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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왜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나 — 역사·국제 심층해설

KSquare 편집부 · 2026.09.27 · 조회 33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전쟁을 밀어붙인 힘은 무엇이었을까

자료 확인: 2026년 9월 27일
2003년 4월 5일 바스라에서 노동자 압둘후세인 유니스 알타야르는 물을 길으러 정원에 나갔다. 잠시 뒤 옆집을 겨냥한 미군의 폭탄이 그의 집까지 무너뜨렸다. 그는 하루 종일 잔해를 헤치며 가족 일곱 명의 시신을 꺼냈다. 미군이 노린 인물은 그날 죽지 않았고 넉 달 뒤 살아서 붙잡혔다. 작전의 문서에서는 ‘요인 표적 공격’일지 몰라도, 그 집에서는 가족을 잃은 날이었다.[25]
왜 이 가족은 죽어야 했을까. 그들이 살던 나라를 침공한 미국 정부는 어떤 위험을 막겠다고 했으며, 전쟁 뒤 그 설명은 얼마나 남았을까.
2003년 3월 20일,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이라크를 침공했다. 당시 미국 정부의 설명은 선명했다. 사담 후세인 정권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거나 개발하고 있으며, 그 무기가 테러 조직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독재자를 제거하면 이라크 국민이 자유를 얻고, 중동에도 민주주의가 퍼질 것이라는 약속도 뒤따랐다.
그러나 전쟁 뒤 미국이 주도한 대규모 조사에서 침공의 핵심 근거였던 현존 대량살상무기 비축고는 발견되지 않았다. 9·11 테러를 수행한 알카에다와 이라크 정권 사이의 작전상 협력도 입증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전쟁을 선택했을까. 한 가지 비밀 동기를 찾아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면 오히려 기록에 남은 더 중요한 문제를 놓친다. 오래된 정권교체 목표, 9·11 이후의 공포, 잘못된 정보와 그 정보의 정치적 사용, 중동의 전략 질서, 그리고 승리 이후를 가볍게 본 판단이 서로 맞물렸다.

첫 번째 층: 후세인 정권은 실제로 위험한 전력이 있었다

침공의 명분이 틀렸다고 해서 후세인이 무해한 통치자였다는 뜻은 아니다. 이라크는 1980년대 이란과의 전쟁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했고 쿠르드족에 대한 잔혹한 탄압을 저질렀다.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해 국제전쟁을 일으켰으며, 1991년 패전 뒤 무장해제 의무와 국제 사찰을 둘러싸고 오랜 충돌을 빚었다. 이러한 과거가 미국과 주변국의 불신을 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거에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사실과 2003년에 당장 사용할 비축 무기와 재개된 핵무기 계획이 있다는 주장은 다르다. 정책 판단은 바로 그 차이를 검증해야 했다. 미국의 1998년 이라크 해방법은 후세인 정권 교체를 미국의 정책 목표로 적었다. 즉 정권을 바꾸고 싶다는 의지는 9·11 이전부터 존재했다. 9·11은 그 목표를 긴급한 안보 문제로 밀어 올린 계기였다.[1][2]

두 번째 층: 9·11의 충격과 ‘최악을 먼저 막자’는 논리

2001년 9·11 이후 미국 지도부는 다음 공격이 화학·생물·핵무기를 동원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부시 대통령은 침공 직전 연설에서 이라크가 가진 위험한 무기가 테러리스트에게 넘어갈 가능성을 경고했다. 여기에는 불확실한 미래의 위협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제거하겠다는 예방전쟁의 논리가 깔려 있었다.[2]
문제는 가능성과 증거가 뒤섞였다는 점이다. 이라크가 알카에다와 접촉한 흔적이 있다는 것, 이라크 정부가 9·11을 지휘했다는 것, 그리고 이라크가 알카에다에 대량살상무기를 넘기려 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주장이다. 미국의 9·11 조사위원회는 과거 접촉이 작전상 협력 관계로 발전했다는 증거도, 이라크가 알카에다와 함께 미국 공격을 계획하거나 실행했다는 증거도 찾지 못했다. 훗날 상원 정보위원회는 행정부가 암시한 이라크·알카에다 협력과 무기 제공 가능성 중 일부가 당시 정보로 뒷받침되지 않거나 오히려 모순됐다고 지적했다.[3][4]
이라크를 9·11의 직접 범인으로 지목한 공식 증거가 없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공포가 컸다고 해서 서로 다른 적을 하나의 적으로 묶어 설명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층: 핵무기 의혹은 침공 전에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전쟁 직전 이라크의 알루미늄 관은 원심분리기 부품일 수 있다는 의혹을 받았다. 아프리카 니제르에서 우라늄을 구하려 했다는 문서도 거론됐다. 그러나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은 2003년 3월 유엔에 제출한 조사 결과에서 해당 관은 로켓 제조용이라는 설명을 뒤집을 증거를 찾지 못했으며, 니제르 거래를 뒷받침한다는 문서는 진품이 아니라고 밝혔다. 당시까지 재개된 이라크 핵무기 계획의 증거나 그럴듯한 징후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5]
그것만으로 이라크의 모든 신고가 완전했다는 뜻은 아니다. 사찰단에는 여전히 해명되지 않은 질문이 있었고, 이라크 정권의 과거 은폐는 의심을 불렀다. 그러나 의심이 남아 있다는 사실과 곧바로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는 결론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441은 이라크에 마지막 이행 기회를 주고 강화된 사찰 체계를 마련했다. 이 결의 자체가 새로운 침공을 명시적으로 허가했느냐는 국제법적 논쟁이 있었다. 미국과 영국은 기존 결의들과 결합해 무력행사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했지만, 영국의 공식 이라크 조사보고서는 평화적인 무장해제 선택지가 소진되기 전에 군사행동을 택했고 전쟁을 마지막 수단으로 보기 어려웠다고 결론지었다.[6][7]
전쟁이 끝나고 이라크 조사단이 광범위하게 수색했지만 침공 당시의 대량살상무기 비축고는 나오지 않았다. 후세인이 제재 해제 후 능력을 다시 갖추고 싶어 했다는 장기적 의도와, 2003년 실제 무기 보유 여부는 분리해서 봐야 한다. 두 질문을 섞으면 사후에도 침공의 근거가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된다.[8]

네 번째 층: ‘잘못된 정보’만으로 설명할 수 있나

미국 정보기관의 실패는 실재했다. 과거 이라크의 무기 개발 전력에 매인 채, 사찰이 중단된 뒤 빈약해진 정보의 틈을 최악의 가정으로 채웠다. 상원 조사에서는 집단사고와 불충분한 정보 검증이 지적됐다. 그렇다고 책임을 정보기관 한 곳에만 돌리면 정부가 불확실한 판단을 국민에게 얼마나 단정적으로 제시했는지가 가려진다.[4][9]
2008년 미국 상원 정보위원회의 다수 보고서는 행정부의 여러 전쟁 전 발언이 당시 정보가 뒷받침하지 않는 내용을 사실처럼 전달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이라크와 알카에다의 관계, 대량살상무기의 테러조직 제공 가능성, 전후 상황에 대한 낙관적인 설명을 문제 삼았다. 이는 모든 지도자가 속으로 진실을 알고 있었다는 개인의 심리 판정과는 다르다. 증거의 한계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정부가 대중에게는 확신을 더 크게 전달했다는 제도적 책임의 문제다.[4]
당시의 반론도 공정하게 봐야 한다. 후세인 정부는 사찰단과 완전한 신뢰 관계를 만들지 못했고, 침공 이전 미국 의회는 무력사용을 승인했다. 일부 정책결정자는 실제로 위협을 믿었을 수 있다. 그러나 선의로 믿었다는 가능성만으로 사찰의 반대 증거를 경시하거나 불확실성을 지워 말한 결정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다섯 번째 층: 석유 때문이었나

이라크는 막대한 석유 자원을 가진 나라다. 따라서 석유와 페르시아만의 전략적 중요성이 정책결정자의 관심 밖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라크의 에너지 공급과 수출을 안정시키는 일은 점령 이후 미국 정부의 주요 과제가 됐다. 그러나 공개된 자료만으로 ‘미국이 이라크 석유를 빼앗으려고 전쟁을 시작했다’는 단일한 지시나 결정적 증거가 확인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석유는 전략적 배경과 전후 운영의 핵심 요소였지만, 유일한 입증된 침공 원인으로 단정할 수 없다.[10]
전쟁 뒤 재건 계약은 또 다른 부조리를 남겼다. 미국 회계감사원(GAO)에 따르면 2003년 검토한 14건의 신규 재건 계약은 모두 완전 공개경쟁 없이 체결됐다. 다만 각 계약에는 당시 법이 인정한 예외 사유가 있었고, 감사원은 일부 기존 계약 아래의 추가 발주에서 규정 준수 문제가 있었다고 구분했다. ‘기업이 이익을 얻었다’는 사실만으로 ‘기업 이익이 침공의 유일한 목적이었다’고 증명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쟁을 결정한 국가와 전쟁을 통해 계약을 얻은 기업의 이익을 엄격히 감시해야 한다는 질문은 남는다.[11]

여섯 번째 층: 독재자를 쓰러뜨린 뒤 국가는 어떻게 되는가

후세인 정권은 빠르게 무너졌다. 그러나 정권의 붕괴가 곧 치안·행정·전기·식수·일자리의 회복을 뜻하지는 않았다. 미국이 이끈 연합군 임시행정처는 이라크 군과 여러 국가기관을 해체하는 명령을 내렸다. 옛 정권의 폭력을 청산하는 일은 필요했지만, 한꺼번에 조직을 없애면 생계와 무력을 가진 사람들이 국가 바깥으로 밀려나고 치안 공백이 커질 위험도 있었다. 영국 이라크 조사보고서는 침공 전에 정치적 붕괴와 극단주의 폭력의 위험이 예견됐고 전후 계획이 충분치 않았다고 평가했다.[7][12]
그 뒤 이라크는 반군 공격, 종파 갈등, 테러, 납치와 대규모 피란을 겪었다. 모든 사망을 침공군의 직접 공격으로만 돌릴 수 없고, 후세인 정권의 책임을 지워서도 안 된다. 그러나 전쟁을 시작하고 점령을 설계한 측은 권력 공백과 그에 따른 위험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브라운대 ‘전쟁의 비용’ 연구는 전쟁의 직접 폭력으로 숨진 사람과 의료·수도·경제 체계의 붕괴로 인한 간접 사망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숫자는 집계 방식과 기간에 따라 달라지지만, 이라크인의 죽음과 이주는 어떤 통계에서도 지워지지 않는다.[13]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의 수감자 학대는 ‘해방’이라는 말과 점령의 실제 모습 사이의 간극을 보여줬다. 후세인 정권의 고문을 비판하며 들어간 국가가 자국의 통제 아래 있는 수감자의 존엄을 지키지 못했다. 잔혹한 독재를 끝내겠다는 목적은 그 과정에서의 학대에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 이 사건은 뒤에서 자세히 살펴본다.[14]

이라크인에게 전쟁은 집 문 앞에서 일어났다

전쟁을 설명하는 문서에는 ‘공습’, ‘표적’, ‘부수적 피해’ 같은 말이 반복된다. 그러나 그 말이 가리키는 곳은 누군가가 저녁을 먹고 아이를 재우던 집이다. 앞에서 만난 알타야르 가족의 죽음은 그런 말 뒤에 놓인 현실이었다.
이틀 뒤 바그다드에서는 한 가정에 가해진 공습으로 엔지니어 자이드 라타 자비르와 가족 다섯 명이 숨졌다. 네 달 된 딸 디나만 뼈가 부러진 채 이웃집 정원에서 발견됐다.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가 만난 삼촌은 왜 군인도 무기도 없는 민가가 폭격당했는지 물었다. 그 질문에 ‘잘못된 정보’라는 말만으로 답할 수 있을까. 살아남은 아기가 자라서 부모의 빈자리를 만날 시간까지 포함하면, 전쟁의 피해는 폭발 순간에 끝나지 않는다.[25]
밤길에 가족을 태우고 집으로 가는 일도 목숨을 건 선택이 됐다. 2003년 8월 바그다드의 한 검문소에서 미군의 총격으로 뒤따르던 차에 탄 아버지와 세 자녀가 숨졌다. 큰아들은 열아홉 살, 딸들은 열일곱 살과 여덟 살이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검문소가 수시로 이동하고 표지가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었으며, 아랍어 통역 부족과 엇갈린 영어 명령이 치명적인 혼란을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운전자가 검문소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과 군인이 위협을 느끼는 것이 같은 순간에 일어나더라도, 죽음의 대가는 민간인 가족이 치렀다.[26]
공습이 그친 뒤에도 길에는 터지지 않은 집속탄의 작은 폭발물이 남았다. 어린이가 무엇인지 모르고 집어 들 수 있는 물건이었다. 부상자를 태울 구급차조차 어두운 길의 불발탄을 피해 들어가지 못한 사례가 기록돼 있다. 부모는 아이를 학교나 가게에 보내며 길 위의 물건을 걱정해야 했다. 그러다 폭력은 미군의 공격에만 머무르지 않고 무장세력, 종파 보복, 납치와 폭탄 테러로 번졌다. 사람들은 집을 떠났고, 피란 뒤에도 전기·화장실·학교·일자리가 부족한 곳에서 오래 살았다.[25][27]
그 분노는 단순히 ‘미국을 싫어한다’는 정치적 구호로 줄일 수 없다. 내가 지켜주겠다는 나라의 폭탄에 가족이 죽었는데, 그 죽음이 작전 보고서의 한 줄로 처리된다면 어떤 마음이겠는가. 집 앞 검문소에서 아이를 잃은 부모가 사고의 설명과 책임을 요구할 때, 담당 군대가 민간인 사망자 수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 휴먼라이츠워치는 당시 미군이 민간인을 고의로 표적으로 삼는다고 결론짓지 않았지만,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한 조치와 조사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26]
후세인 정권의 군대와 민병대도 민간인 사이에 숨어 싸우거나 의료 표시를 악용했다. 반군과 종파 무장세력도 수많은 이라크인을 죽였다. 이들의 책임을 빼면 현실이 왜곡된다. 그러나 다른 가해자가 존재한다는 말은 침공을 결정하고 점령을 운영한 세력의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이라크 국민에게 전쟁은 ‘누가 더 나쁜가’를 토론할 여유가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가족을 묻고, 물을 구하고, 살아서 다음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는 하루하루였다.[25]

점령에 대한 분노: 이라크의 저항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인이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을 떠올릴 때, 독립군의 행동은 단순한 ‘치안 교란’이 아니다. 탄압받는 사람들에게 조국을 되찾을 수 있다는 뜻을 몸으로 보여준 일이기도 하다. 이 기억은 이라크를 바라보는 데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외국 군대가 자기 땅을 침공하고 통제할 때, 그곳 사람의 저항을 점령국의 언어만으로 ‘테러’라고 부를 수 있는가. 두 시대의 역사와 모든 무장조직을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누가 누구의 땅에서 총을 들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지워서는 안 된다.
바스라에서 가족을 잃은 아버지나 검문소에서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미국에 대한 분노는 추상적인 이념이 아니다. 대량살상무기를 찾겠다던 전쟁이 무기를 찾지 못했고, 이라크인의 자유를 약속한 군대가 거리와 감옥을 통제했다. 누군가의 집에서는 가족의 빈자리가 남았다. 그들이 침공과 점령의 책임을 묻고 외국 군대가 떠나기를 바라는 것은 충분히 합리적인 정치적 요구다. 그 분노를 ‘반미 감정’이라는 한마디로 축소하면, 미국의 행동이 만들어낸 원인을 감추게 된다.[8][25][26]
숫자에도 그 거리가 나타난다. 이라크인 2,228명을 대면 조사한 2009년 ABC·BBC·NHK 조사에서 미국을 긍정적으로 본 사람은 18%였고, 56%는 침공이 잘못됐다고 답했다. 81%는 2011년까지 철군한다는 당시 일정에 찬성하거나 철군을 앞당기기를 원했다. 한편 42%는 미군이 떠난 뒤 치안이 악화할까 걱정했다. 침공을 반대하면서도 철군 이후의 위험을 두려워한 것이다. 이 조사 역시 그해의 이라크 여론이지 오늘날 모든 이라크인의 마음을 영구히 재는 수치는 아니다.[28]
주변 지역에서도 미국의 이미지는 크게 나빴다. 퓨리서치센터의 2005년 조사에서 미국에 호감을 보인 비율은 요르단 21%, 튀르키예 23%였다. 그러나 레바논에서는 종교집단별 견해가 크게 달랐고, 국가와 시기에 따라서도 결과가 달랐다. 따라서 ‘중동 사람들이 모두 미국을 증오한다’고 말하면 실제 사람들의 의견과 변화를 지워버린다. 그들이 비판한 미국 정부의 전쟁 정책,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호오, 개별 미국인에 대한 태도도 같은 말이 아니다.[29]
저항의 성격도 구분해야 한다. 외국군의 점령에 반대하고 독립과 주권을 요구하는 일은 정당한 정치적 목표다. 점령군을 상대로 한 무력행동을 평가할 때에는 실제 표적과 방법을 따져야 한다. 시장의 쇼핑객, 출근길의 노동자, 다른 종파의 이웃을 죽이는 폭탄 공격까지 ‘독립군의 저항’으로 칭송할 수는 없다. 민간인을 겨냥하거나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행위는 어느 쪽이 저질렀든 전쟁법에 어긋난다. 이라크인들은 점령군의 폭력뿐 아니라 무장세력과 종파 보복의 피해자이기도 했다.[25][27][30]
그렇다면 미국을 향한 증오는 합리적인가. 침공을 결정한 정부와 점령을 운영한 권력에 대한 분노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다. 죽은 가족을 기억하며 그 책임을 묻는 사람에게 ‘미워하지 말라’고 훈계할 자격은 가해국에 없다. 다만 그 책임을 미국인 모두에게 똑같이 씌우거나, 분노를 무고한 사람의 살해 허가증으로 바꾸는 순간 또 다른 가족이 같은 상실을 겪는다. 점령을 겪은 사람의 분노를 있는 그대로 듣는 것과 모든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미국이 ‘해방’이라고 이름 붙인 전쟁을, 이라크인은 자기 삶을 빼앗긴 경험으로 기억할 권리가 있다.

침공은 ‘전쟁범죄’였나: 법의 이름과 책임의 빈자리

전쟁을 시작할 권한의 문제와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저지른 범죄는 법적으로 구분된다. 유엔헌장은 원칙적으로 다른 나라에 대한 무력사용을 금지하고, 자위권 또는 안보리의 승인 같은 예외를 둔다. 2004년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이라크 침공이 유엔헌장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혔다. 미국과 영국은 기존 안보리 결의와 이라크의 의무 불이행을 근거로 무력행사를 정당화했다. 이 법적 논쟁이 있었다는 것과 별개로, 영국의 공식 조사도 전쟁이 마지막 수단이 아니었다고 판단했다.[7][15]
따라서 2003년의 침공 자체를 확정된 형사판결상의 ‘전쟁범죄’라고 쓰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침공의 위법성은 흔히 ‘침략’ 또는 불법적인 무력사용의 문제로 논의된다. 민간인 고의 공격, 고문, 수감자 학대 같은 전쟁 중 행위는 별도로 전쟁범죄가 될 수 있다. 법률 용어를 나누는 까닭은 미국의 책임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무엇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흐리지 않기 위해서다. 아부그라이브에서 벌어진 학대는 몇 장의 사진으로 끝나는 수치가 아니었고, 그런 행위의 피해자에게는 개별적 진상 규명과 구제가 필요했다.[14][16]

‘죄송하다’는 말은 무엇에 대한 사과였나

미국이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고 하면 사실과 다르다. 부시 대통령은 2004년 아부그라이브 수감자와 가족에게 가해진 굴욕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했고, 백악관도 수감자 학대에 유감을 표했다. 하지만 그것은 수감자 학대에 대한 사과였다. 존재하지 않는 대량살상무기를 이유로 전쟁을 시작한 결정 자체, 그로 인한 이라크 사회의 파괴 전체에 대한 국가의 책임 인정과 포괄적 배상은 다른 문제다. 한 사건에 대한 사과를 전쟁 전체에 대한 사과로 바꿔 읽을 수 없다.[17]
보상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 국방부는 민간인 사망·부상·재산 피해에 대해 위로금과 현지 관습에 따른 지급을 했고, 비전투 활동으로 생긴 피해에는 별도의 청구 절차를 운영했다. 그러나 미국 회계감사원에 따르면 전투 피해에 대한 위로금은 법적 과실이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돈이 아니었다. 지급 여부와 액수는 지휘관의 재량에 맡겨졌으며 의무 지급도 아니었다. 2004년 이라크의 초기 지침에서 사망 사건당 위로금 상한은 $2,500이었다. 뒤에 일부 승인 한도가 조정됐지만, 이 금액이 전쟁으로 빼앗긴 한 사람의 생명에 대한 정당한 평가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18]
더구나 회계감사원은 국방부가 신청 후 거절된 건수조차 추적하지 않았고, 공개 집계만으로 민간인 피해의 전체 규모를 파악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지급을 받지 못한 사람, 신청할 길을 몰랐던 사람, 안전 때문에 접근할 수 없었던 사람은 통계에서 사라질 수 있다. 2005~2006년 이라크에서 보고된 위로금 총액은 약 $2,884만이었지만, 이 수치는 모든 전쟁 피해에 대한 배상 총액이 아니며 지급된 개별 사망자의 수로 환산해서도 안 된다.[18]
미국은 이라크 재건에도 막대한 돈을 썼다. 그러나 재건 예산은 미국의 안보·외교 목표와 이라크 국가 기능의 복구를 위해 집행된 것이지, 피해자마다 침공 책임을 인정하고 손해를 산정해 지급한 전쟁 배상금과는 다르다. 돈이 투입됐다는 사실로 책임 인정의 부재를 덮을 수 없다.[19]
이것이 전쟁에 얽힌 가장 큰 부조리 가운데 하나다. 강대국은 전쟁을 시작할 때 국가의 운명을 바꿀 만큼 확신에 차 있었지만, 무기 근거가 무너진 뒤에는 피해를 온전히 집계하거나 모든 피해자에게 설명하고 배상하는 체계를 만들지 않았다. 수감자 학대에는 제한된 사과, 민간인 피해에는 재량에 따른 위로금, 국가 파괴에는 재건 사업이 따로따로 존재했다. 결정의 크기와 책임을 지는 방식의 크기가 전혀 맞지 않았다.

아부그라이브: ‘몇몇 군인의 장난’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

아부그라이브가 무엇인가. 바그다드 서쪽의 이 교도소는 후세인 정권 시절에도 공포의 장소였다. 미군은 침공 뒤 그곳을 수감·심문 시설로 사용했다. 2003년 말, 미군이 통제하던 시설 안에서 이라크 수감자들이 학대받았다. 2004년 1월 미군 병사 조지프 다비가 사진을 군 수사기관에 전달했고, 그해 4월 사진이 공개되자 세계가 사건을 알게 됐다. 즉 학대 사실은 단순히 외부의 소문이 아니라 내부 제보와 군 자체 조사로 드러났다.[20]
무슨 일이 있었나. 수감자들을 벌거벗겨 서로 쌓아 올리거나 성적인 자세를 강요하고 사진을 찍었다. 한 사람에게는 머리에 두건을 씌우고 전선이 달린 채 상자 위에 서 있게 했다. 목줄을 채운 모습과 개로 위협하는 장면도 기록됐다. 구타와 심한 모욕에 관한 조사 결과도 있다. 모든 사진이 같은 사람의 행위나 같은 날의 사건은 아니지만, 공통점은 분명하다. 갇힌 사람들은 거절하거나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고, 자신을 지켜야 할 교도소 관리 인력의 통제 아래 있었다. 그러므로 이는 ‘불쾌한 사진’의 문제가 아니라 구금된 인간을 겁주고 모욕하고 학대한 문제다.[20][21]
왜 그런 일이 가능했나. 현장 군인 몇 명의 잔혹한 선택에는 당사자의 책임이 있다. 하지만 거기에서 설명을 멈추면 감독체계가 보이지 않는다. 미 상원 군사위원회는 2008년 조사에서 아부그라이브 학대를 소수 병사의 독단으로만 볼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아프가니스탄과 관타나모에서 승인된 강압적 심문 방식 일부가 이라크로 흘러들었고, 고위 군·민간 당국자가 승인한 정책은 수감자에게 육체적 압박과 굴욕을 가해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는 것이다. 별도의 미군 조사도 불분명한 지휘선, 부족한 교육과 인력, 심문 성과에 대한 압박을 지적했다. 그렇다고 모든 상관이 사진 속 개별 학대 행위를 직접 지시했다는 뜻은 아니다. 개인의 범죄와 그것을 막지 못하거나 부추긴 제도적 책임을 함께 물어야 한다는 뜻이다.[22][23]
처벌은 있었나. 있었다. 사진을 제보한 병사 이후 미군의 형사수사가 진행됐고, 여러 하급 군인이 군법회의에서 유죄판결과 처벌을 받았다. 부시 대통령도 학대받은 수감자와 가족에게 사과했다. 그러니 ‘미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은 틀리다. 그러나 재판에 선 사람들의 범위와 고위층의 정책·감독 책임이 충분히 규명됐느냐는 별개의 질문이다. 상원 보고서는 정책의 영향을 지적했지만 보고서 자체가 관련 최고위 정책결정자에게 형사판결을 내린 것은 아니다.[17][20][22]
피해자는 배상받았나. 일부 피해자는 미국 법원에서 민간 군사계약업체 CACI를 상대로 오랜 소송을 벌였다. 2024년 배심원단은 이라크인 원고 세 명에게 총 $4,200만의 손해배상을 인정했고, 2026년 3월 항소심도 이를 유지했다. 그러나 2026년 8월 항소법원은 관련 대법원 판결을 반영해 앞선 결정을 뒤집고 사건을 기각하도록 돌려보냈다. 따라서 2026년 9월 현재 이 $4,200만을 최종 확정·지급된 배상으로 써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은 국가가 모든 수감자에게 배상한 사례도 아니다. 원고 세 사람이 2008년 소송을 제기한 뒤 법정 문턱을 넘는 데에만 수십 년이 걸린 과정을 보여준다.[24]
아부그라이브의 사진은 미국이 내세운 ‘이라크인의 자유’라는 명분을 뒤집어 물었다. 독재자의 감옥을 접수한 새 권력이 그 안의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가. 병사의 처벌과 사건별 유감 표명만으로, 고문을 용인할 수 있게 만든 판단과 피해자들의 오래 남는 상처에 답했다고 할 수 있는가. 수감자는 국가가 적이라고 부르더라도 인간으로 대우받을 권리가 있다. 그 최소한을 지키지 못한 순간, 해방이라는 약속은 현장에서 무너졌다.

그래서 미국은 왜 침공했나

공식 답은 무장해제와 미국의 안전, 정권 교체와 이라크인의 자유였다. 역사적 설명은 더 복잡하다. 1990년대부터 이어진 정권교체 정책, 9·11 이후의 최악을 상정한 안보 사고, 후세인의 실제 범죄와 반복된 불신, 실패한 정보분석, 불확실한 정보를 확신으로 바꾼 정치적 언어, 중동의 전략적 이해, 빠른 승리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 것이라는 낙관이 겹쳤다.
전쟁의 가장 큰 부조리는 여기 있다. 존재가 확인되지 않은 위협에는 급박한 확신을 요구하면서, 전쟁이 만들어낼 확인 가능한 위험에는 충분한 대비를 하지 않았다. 무기 사찰이 진행 중이던 국가에 전쟁을 시작했고, 무기가 나오지 않은 뒤에도 그 결정의 비용은 이라크 민간인과 참전 군인, 가족, 미래 세대에게 오래 남았다.
이 사례가 주는 교훈은 ‘어떤 독재자도 위험하지 않다’가 아니다. 위험을 주장하는 정부일수록 그 증거의 강도, 반대 증거, 군사행동 이외의 선택지, 전쟁 이후의 책임을 더 엄격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틀린 예측의 대가는 결정을 내린 사람보다 그 결정을 견뎌야 하는 사람에게 먼저 돌아간다.
그리고 이라크의 폐허를 지켜본 나라가 있었다. 북한이다. 미국이 ‘대량살상무기’라는 이유로 이라크를 침공했는데, 정작 그 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후세인 정권은 무너졌고 이라크 국민은 긴 전쟁을 겪었다. 평양의 지도부라면 여기서 무엇을 배웠을까. 미국의 위협을 받는 정권이 무기를 포기하거나 약한 상태로 있으면, 의혹만으로도 공격받을 수 있다. 그러니 침공을 막을 억지력을 손에서 놓지 말아야 한다. 이는 북한 지도자의 마음을 들여다본 사실이 아니라, 당시의 사건과 북한의 행동을 연결한 추론이다.
시간 순서를 정확히 봐야 한다. 북한은 이라크 침공 전인 2003년 1월 이미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했다. 따라서 이라크 전쟁이 북한 핵 개발을 처음 시작하게 만들었다고 쓸 수는 없다. 하지만 2003년 말 북한을 직접 방문한 핵과학자 지그프리드 헤커의 기록에 따르면, 북한은 미국에 자신이 핵무기를 가졌다고 믿게 하려 했다. 2006년에는 첫 핵실험을 했다. 이라크 침공은 북한의 기존 안보 불안을 강화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 뒤의 모든 핵 정책을 오직 이 전쟁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31][32]
이 결말은 북한 정권의 핵무장을 옹호하려는 말이 아니다. 그 무기가 한반도 사람들에게 안기는 위험도 현실이다. 다만 전쟁의 부조리는 국경에서 멈추지 않는다. 핵무기를 막겠다는 명분으로 시작한 침공이, 다른 나라의 지도부에는 ‘핵무기가 있어야 살아남는다’는 신호로 읽힐 수 있었다. 이라크인이 치른 참혹한 대가 위에, 세계는 또 하나의 위험한 교훈을 남긴 셈이다.

자료와 검증 범위

이 글은 공개 기록을 토대로 쓴 역사 해설이다. 미국 지도부의 모든 내면적 동기를 확인한 독점 취재 기사가 아니며, 동기의 해석은 명시적으로 구분했다. 사망 규모에 대한 단일 추정치를 제시하지 않은 것은 직접 사망, 간접 사망, 집계 기간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1. 미국 이라크 해방법(1998) — https://www.govinfo.gov/content/pkg/PLAW-105publ338/html/PLAW-105publ338.htm 및 2002년 무력사용 승인 결의 — https://www.govinfo.gov/content/pkg/PLAW-107publ243/html/PLAW-107publ243.htm.
2. 부시 대통령의 2003년 3월 17일 대국민 연설 — https://georgewbush-whitehouse.archives.gov/news/releases/2003/03/20030317-7.html.
3. 미국 9·11 조사위원회 최종보고서 — https://www.govinfo.gov/content/pkg/GPO-911REPORT/pdf/GPO-911REPORT.pdf, 66쪽 부근.
4. 미 상원 정보위원회 2008년 전쟁 전 발언 조사 결과 — https://www.intelligence.senate.gov/2008/06/05/press-senate-intelligence-committee-unveils-final-phase-ii-reports-prewar-iraq-intelligence/.
5. IAEA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의 2003년 3월 핵사찰 보고 — https://www.iaea.org/newscenter/statements/status-nuclear-inspections-iraq-update.
6.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441 — https://press.un.org/en/2002/sc7564.doc.htm.
7. 영국 공식 이라크 조사보고서 요약 — https://www.gov.uk/government/publications/the-report-of-the-iraq-inquiry, 2016.
8. 미국 이라크 조사단 Duelfer 보고서 — https://www.govinfo.gov/app/details/GPO-DUELFERREPORT/context, 2004.
9. 미 상원 정보위원회의 전쟁 전 정보 평가 조사 관련 기록 — https://www.intelligence.senate.gov/2006/11/16/publications-committee-activities-2003-2004-november-16-2006/.
10. 미국 GAO의 이라크 석유 부문 복구 평가 — https://www.gao.gov/assets/a260657.html.
11. 미국 GAO의 이라크 재건 계약 감사 — https://www.gao.gov/products/gao-04-605, 2004.
12. 연합군 임시행정처 명령 제2호: 기관 해체 — https://www.govinfo.gov/app/details/GOVPUB-S-PURL-LPS45365.
13. 브라운대 전쟁의 비용 연구: 직접 사망 집계와 한계 — https://costsofwar.watson.brown.edu/paper/human-cost-post-911-wars-direct-war-deaths-major-war-zones.
14. 미 육군 연구지의 아부그라이브 수감자 학대와 조사보고서 인용 — https://www.armyupress.army.mil/Journals/Military-Review/English-Edition-Archives/September-October-2022/Duncan/.
15. 유엔 사무총장실의 2004년 9월 브리핑 기록 — https://www.un.org/sg/en/content/highlight/2004-09-16.html: 아난 사무총장의 유엔헌장 관련 견해.
16. 국제형사재판소 검찰의 이라크 관련 관할권 설명 — https://www.icc-cpi.int/news/statement-prosecutor-correcting-assertions-contained-article-published-telegraph: 전쟁범죄와 침략범죄의 구분.
17. 부시 대통령의 아부그라이브 수감자 학대 관련 발언 — https://georgewbush-whitehouse.archives.gov/news/releases/2004/05/text/20040507-7.html.
18. 미국 GAO 민간인 위로금·청구 절차 감사보고서 — https://www.gao.gov/products/gao-07-699, 2007. 상세 지급 한도와 자료 집계 문제는 보고서 전문 — https://www.gao.gov/assets/a261108.html.
19. 미국 GAO 이라크 재건 자금의 목적과 진행 평가 — https://www.gao.gov/products/gao-05-876, 2005.
20. 미 육군 법무학교 간행물 아부그라이브 군법회의 15년 후 회고 — https://tjaglcs.army.mil/tal-2019-issue-4/Post/6241/No-1-Abu-Ghraib-Trials-15-Years-Later: 내부 제보, 사진과 기소 경위.
21. 미 육군 Taguba 조사보고서 — https://www.esd.whs.mil/Portals/54/Documents/FOID/Reading%20Room/Detainne_Related/TAGUBA_REPORT_CERTIFICATIONS.pdf: 수감자 학대 조사.
22. 미 상원 군사위원회 미국 구금시설 수감자 처우 조사보고서 — https://www.armed-services.senate.gov/download/inquiry-into-the-treatment-of-detainees-in-us-custody, 특히 결론 19.
23. 미 국방부 수감자 심문 조사 기록 — https://www.esd.whs.mil/Portals/54/Documents/FOID/Reading%20Room/Detainne_Related/church_report_1.pdf: Fay 조사 등의 제도적 문제에 대한 요약.
24. 피해자 소송 수행 단체의 Al Shimari 대 CACI 사건 연혁 — https://ccrjustice.org/AlShimari: 2024년 배심 평결과 2026년 8월 항소심의 후속 결정. 소송 진행에 관한 당사자 자료임을 감안해 읽어야 한다.
25. 휴먼라이츠워치의 2003년 현장 인터뷰 공습·집속탄 피해자의 증언 — https://www.hrw.org/legacy/press/2003/12/iraq-accounts.htm. 이라크군의 민간인 방패 사용에 관한 목격 기록도 포함한다.
26. 휴먼라이츠워치의 바그다드 민간인 사망 현장조사 — https://www.hrw.org/report/2003/10/20/hearts-and-minds/post-war-civilian-casualties-baghdad-us-forces, 2003.
27. 유엔난민기구의 이라크 국내 실향민과 생활 여건 기록 — https://www.unhcr.org/news/stories/unhcr-concerned-sectarian-violence-iraq-threatens-new-internal-displacement.
28. ABC·BBC·NHK의 2009년 이라크 전국 대면 여론조사 — https://abcnews.com/PollingUnit/story?id=7058272&page=1: 미국에 대한 평가, 침공과 철군에 대한 의견, 철군 후 치안 우려.
29. 퓨리서치센터의 2005년 국가별 미국 이미지 조사 — https://www.pewresearch.org/global/2005/06/23/chapter-1-image-of-the-united-states/: 요르단·튀르키예·레바논 등의 차이.
30. 국제적십자위원회의 민간인 보호와 군사목표 구별 원칙 — https://casebook.icrc.org/law/civilian-population.
31.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북한 핵 관련 주요 사건 연표 — https://www.iaea.org/newscenter/focus/dprk/chronology-of-key-events: 2003년 1월 탈퇴 선언과 2006년 핵실험.
32. 지그프리드 헤커의 북한 핵 위기에 관한 직접 방문 경험과 분석 — https://www.amacad.org/publication/daedalus/lessons-learned-north-korean-nuclear-crises: 2003년 말 북한 방문과 억지력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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